선명한 색채로 여성을 관능적으로 그린 회화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벌거벗은 여성을 그린 것으로 당시 유력한 예술단체로부터 반발을 받거나 제국의회에서 처음으로 문화적 논의를 발발시키는 등의 일화가 유명.

또한 클림트는 찬란하게 빛나는 금을 사용한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클림트가 금 사용에 집착한 이유에 대해, 뉴욕의 아트계 매체인 Artnet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세기 말 비엔나에서 전시회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쿤스트라 하우스라는 보수적인 예술가 단체로, 오스트리아 화가는 쿤스트라 하우스에 소속하는 것이 의무처럼 되어 있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클림트들은, 빈 분리파를 결성했고, 이후 클림트는 'Nuda Veritas(벌거벗은 진실)' 등 관능적인 나부화(벗은 여자 그림)를 반복적으로 제작해, 클림트가 만들어낸 작품은 '도발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쿤스트라 하우스와의 갈등과, 관능적인 주제 외에 클림트가 집착했던 것이 '금(gold)'이었고, 클림트의 대표작인 '키스(입맞춤)'는 언뜻 보면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자세히 보면 남자의 목이 흉측하게 뒤틀려 있어 '남자는 성욕을 의인화한 것'으로 해석되는 '더러운 현실'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키스에서는 전면에 걸쳐 금박이 다량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

또한, 1907년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I'에서도, 전면에 걸쳐 금박이 장식되어 있는데,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I'은 그 호화로움 때문에 2006년에 사상 최고가인 1억3500만달러에 구입되어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에 올랐다.
클림트는 1902년 빈 분리파 전시회용으로 그린 '베토벤 프리즈'를 발표한 바 있으며, 이 작품에도 금박이 사용되고 있다. 다음은 1903년에 발표된 'Life is a Struggle(The Golden Knight)'이라는 작품으로, Google Arts&Culture에서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다. Artnet에 따르면, 갑옷 묘사는 클림트가 캔버스에 금색을 넣는 경우가 많은 주제 중 하나였다고 한다.

Artnet은, 클림트가 20세기 초 약 10년 정도 금 장식에 열중한 이유에 대해, 클림트의 내력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클림트는 음악가에 뜻을 두었던 어머니와 조각가 겸 금세공사인 아버지를 부모님으로 둔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클림트는 훗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였던 동생 게오르크와 일을 하게 되었고, 금빛 액자를 게오르크에게 의뢰하기도 했다. Artnet은 "이러한 공동 작업은 클림트의 장식 예술에 대한 열의, 금에 대한 열정, 그리고 작품을 형성한 가족의 영속적인 유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클림트는 이집트 신화의 모티브, 인상파의 모더니즘 등 모든 예술을 좋아했는데, 특히 6세기경 동로마제국의 문화양식인 비잔틴의 모자이크화나 이콘(성상화)에서는 금을 '영원한 영역'이라는 의미로 사용했기 때문에, 클림트는 비잔틴에서 영감을 얻어 금에 의한 영원한 감각을 표현했다고 생각된다.
금박을 사용한 것은 클림트뿐만이 아니고, 다음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약한 오스트리아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설계한 빈 분리파 회관으로, 건물의 윗부분에는 금박 모양의 돔이 있어 그 형상 때문에 '금양배추'라고도 불린다.

클림트는 다작의 화가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작품은 4000점 이상이고, 회화 작품에 한해서도 200점 이상을 완성했다고 생각된다.
그 중 금박을 듬뿍 사용한 작품은 대표적인 극히 일부 작품뿐이었으며, 또한 클림트나 올브리히 이외에도 금장식을 사용한 빈 분리파 아티스트는 여럿 있었고, 빈 분리파 주요 아티스트가 만든 빈 공방이 제작한 오브젝트 중 금이나 금박을 사용한 오브젝트나 디테일은 매우 인기가 있었다. 클림트는 자신의 작품에 금색을 사용함으로써 작품에 의미를 담음과 동시에, 금색을 통해 당시 디자인이나 다른 예술가들과 대화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금색은 빈 분리파 예술가들의 매우 현대적인 감성을 반영한 것이 되었습니다"라고 Artnet은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