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화 문화에 가장 공헌 한 브랜드가 "나이키"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나이키는 런닝과 힙합과 스트리트웨어를 잇는 세계관을 만들뿐만 아니라, 선수를 신격화하고 미국인이 운동에 대해 갖는 의식까지도 완전히 바꿨다.
50년 전 창업 당시부터 일관되게 미국의 문화로서 "쿨"을 정의 해 온 나이키의 역사를 되돌아 보자.
◆ 1973년, 나이키는 처음으로 선수를 광고에 기용
"프리"의 애칭으로 알려진 스티브 프리폰테인(Steve Prefontaine)은 전설적인 육상 선수.
그는 당시 약관 15세로 2마일(약 3.2km), 8분 41초 5의 국내 기록을 세웠다. 자동차 사고로 24세로 사라지기 전까지 2000미터에서 1만미터까지 중장거리 종목에서 모두 국내 기록 보유자가됐다.
프리는 1974년에 5,000달러에 나이키와 계약했다. 당시 나이키는 창업한지 3년째 되는 해였다.
그의 흐르는 듯한 머리, 펑크 로커 같은 태도, 전인미답의 성공 덕분에 나이키는 자신감이 충만, 성공가도를 달리는 선수의 이미지와 딱맞는 이미지를 확립할 수 있었다.
◆ 1970년 ~ 1978년, 나이키는 조깅붐을 일으킨다
나이키의 공동 창업자 인 빌 바우어만(Bill Bowerman)은 원래 오레곤 대학의 육상 코치로, 프리를 대학으로 이끌었고, 그 후 나이키와의 계약을 성사시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바우어만은, 후에 "조깅"이라고 부르게 되는 레크레이션으로 한 조깅의 열렬한 추진자였다. 옛날부터 계속 인기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겠지만, 실제로는 1970년대에 붐이 일어날때까지 조깅은 일반적인 취미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마케팅 분석가 가렛 문씨는, "1970년대, 달리기는 이미 학생들과 선수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지만, 아직 지금처럼 사회 전반에 퍼져있지는 않았다. 당시 증가했던 화이트 칼라 층이 건강에 도움이 되는 습관으로 달리기를 사회적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추세가 뿌리 내리고 난 다음 "조깅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요구가 태어났다"라고 말했다.
달리기를 메인 스트림으로 끌어올린 계기는, 바우어만이 의사와 함께 레크레이션으로 달리기의 장점을 설명 한 "Jogging"이라는 책. 미국의 신발 시장의 50% 가까이를 점유하고 있던 메이커로서 나이키는 이 붐으로 큰 혜택을 받았다.
◆ 1985년, 에어 조던 등장
마이클 조던(Michael Jordan)과의 광고 계약이 회사에 얼마나 기여하게 될지 당시에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초의 콜라보레이션으로 탄생한 에어 조던은, 1985년 9월에 출시되었다. 이 신발이 규정이 정한 색채 위반으로, 1985년에 NBA의 공식 경기에서 사용이 "금지"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이후 조던이 경기에서 신발을 신을 때마다, 그는 리그에서 5000달러의 벌금을 부과했지만, 물론 나이키는 그 벌금을 기꺼이 지불했다.
나이키는 이 사건을 다룬 텔레비전 CM을 방영하는 것으로, 신발에 멋진 이미지를 줄 수 있었다. 에어 조던은 매우 인기를 끌고, 그것이 엄청난 성공으로 이어진다.
에어 조던 이후, 나이키의 서브 브랜드로 성장하고 한정 상품이 나올 때마다 매장에 줄을 만드는 열광적인 팬을 낳게 되었다.
◆ 1988년, 마이클 조던과 스파이크 리의 CM 출연
광고 대행사 와이덴 앤 케네디(Wieden+Kennedy)는 후세에 남는 인상적인 CM을 여러개 나이키를 위해 제작했다.
1980년 후반, 이 회사는 마이클 조던과 스파이크 리(Spike Lee)를 공연했다. 4년에 걸쳐 방영 된 이 CM 시리즈로 스파이크 리는 "화성 블랙몽(Mars Blakmon)"이라는 비정상적으로 건강하고 불안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원래 와이덴 앤 케네디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짐 리스월드(Jim Riswold)에 의하면, 이것은 나이키의 CM이 선수 이외를 등장시킨 첫 사례로, 상당히 화제를 불러 모았다.
짐 리스월드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유머와 대중 문화 자료를 섞어서, 나이키가 처음으로 선수의 인간적인 측면을 보였다. 이 CM으로 나이키가 선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팬을 포함한 모두에게 개방 된 것이라고 느낌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마스 블랙몽 보다 열광적인 팬은 없다니까"
◆ 90년대, 메인 스트림에 올라서는 나이키
1990년대에는 나이키는 미국 최대의 스포츠웨어 메이커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있었다. 1997년에 시장 점유율이 47.5%에 달할 정도로 인기, 즉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는 운동화 2켤레 중 1켤레는 나이키였다.
조던 이후도 나이키와 톱과의 파트너십은 이어져 브랜드의 대명사가 되었다.
◆ 2002년, 넬리의 "에어 포스 원"의 출시
2002년 넬리(Nelly)의 신곡 "에어 포스 원스(Air Force Ones)"가 빌보드 차트 톱 3에 들어갔다.
곡명은 1982년 발매의 운동화 에어 포스 원을 딴 것으로, 에어 포스 원을 구입한다는 노래였다. 이것을 발단으로 나이키와 조던 브랜드를 테마로 하는 랩 뮤지션과 힙합 뮤지션이 늘어났다.
최근에도 드레이크(Drake)와 퓨처(Future)의 합작 "점프맨(Jumpman)"과 프랭크 오션(Frank Ocean)의 "나이키(Nikes)"라는 예가 있다.
◆ 2007년, 카니예 웨스트와의 파트너십
2007년 나이키는 랩 뮤지션으로 힙합의 아이콘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와 협력을 시작했다. 이것은 선수가 아닌 유명 인사와의 대규모 협업으로는 나이키 역사상 처음이었다.
웨스트의 스타로서의 영향력과 Air Yeezy I 및 II의 독특한 디자인의 시너지 효과로 신발은 출시와 동시에 순식간에 매진되었다.
카니예는 그 후 아디다스(Adidas)로 갈아타지만, 그의 나이키 신발, 특히 얼리 인 Yeezy II는 운동화 문화 사상 가장 가치있는 수집 항목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레드 옥토버"라고도 불리는 이 신발은 지금도 수천 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 2016년, HyperAdapt 1.0 등장
2016년 나이키는 자동으로 신발 끈을 조절하는 운동화 "HyperAdapt 1.0"을 출시했다. 이것은 운동화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SF 영화 "백 투 더 퓨터 PART2"에 등장하고, 나중에 Nike Mag라고 불리게 된 신발로 예견되어 있던 나이키의 새로운 "적응 레이싱" 기술을 응용 한 첫 번째 제품이다.
나이키는 SF 영화를 바탕으로 환상처럼 움직이는 리얼 한 신발을 정말 만들어냈다. 이 신발에 발을 밀어 넣으면, 다리에 맞게 신발이 자동으로 맞춘다는. 신발끈을 만질 필요가 없다.
720 달러라는 높은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이 신발은 바로 매진되어 버렸다.
◆ 나이키의 현재와 미래
나이키는 그 멋진 브랜드 이미지를 항상 고급품 시장과 새로운 카테고리에 도전하는 것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다. 그 대부분은 현재 북미의 캐쥬얼웨어 업계를 석권하고 있는 추세로 "아스 레저"에도 부합하고 있다.
나이키는 이제 기존의 클래식 스포트 라인에 더해, 프리미엄 스포츠 브랜드 "Nike Sportswear"와, 프리미엄이면서 실험ㅈ거인 스트리트웨어 브랜드 "Nike Lab"도 가지고 있다.
나이키와 Nike Lab은 민감한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브랜드 슈프림(Supreme), APC, Comme des Garcons 등과 자주 협업하고 있다...